22일
아침에 로바니에미 역에 내리자마자 매표소로 달려가 헬싱키 행 야간열차 예약을 침대 칸으로 바꿨다.
로바니에미 시내로 가는 길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과연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출근길 지옥이라는 게 존재할까? -_-
아침이라 체크인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쌓였다.
어쨌든 호텔로 들어가서 짐을 맡겨야겠다 싶어 들어가니 이게 웬걸! 체크인이 가능하단다.
방에 들어갔는데 매우 귀여운 사슴 인형이 침대 위에 놓여져 있다.
호텔이 참 센스 있는 기념품을 준비하였다고 생각하며
귀에 붙은 씨티호텔 태그 뒷면을 확인하는 순간
적혀 있는 가격 18유로 + 리셉션에서 구입 가능하다는 친절한 안내문. -_-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엄마 전화에 깨니까 오후 세시.
오전 아홉시든 오후 세시이든 여전히 어두운 걸 보니, 나 라플란드 온 거 맞구나.
저녁 먹으러 밖에 나갔다가 서브웨이 발견!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서브웨이면 돼!!
샌드위치 사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티비 보면서 쉬었다.
CNN에서는 중국 멜라민 파동 관계자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기사가 연신 나왔다.
이리저리 채널 돌리는데 여기는 미국 프로그램을 참 많이 해준다.
KBS에서 CSI나 프렌즈 틀어주면 이상할 것 같은데...
23일
눈을 떠보니 아홉시가 넘었다.
아침!!!
아침!!!!!!
아침 먹어야 한다!!!!
아침 부페에 연어가 있어서 쌩뚱맞았다. 쌩뚱맞아도 다 먹었다. 킄킄킄
체크아웃 후 짐을 맡기고 arctic circle로 데려다 줄 8번 버스를 기다렸다.
한 시간 간격으로 오는 버스라 시간이 많이 남아 시내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가 들려 가보니 Arctic Lapland Rally 행사가 한참이다.
이쪽 대회 중에서는 상당히 큰 경주인가보다.
이 추운 날씨에 눈밭을 달리는 경주라...수고하슈.
마침내 도착한 8번 버스를 타고 산타마을로 향했다.
내가 가서 뭘 보겠다고 북극권으로 가는 건지-_-?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내 몸 속에 잠자고 있던 귀차니즘이 다시 꿈틀꿈틀.
북극권이다, 이건가.
근데 북극에 가면 뭐가 있다고 북극에 가는 거지?
아문센이 들으면 뭐시라! 하며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군.
어쨌든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으므로 간다!
어디 저 멀리 북극권 핵심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꼴랑 북극권 경계에 걸쳐져 있는 산타마을 보러 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궁시렁궁시렁.
산타마을 도착!
위를 가로지르는 선이 arctic circle 경계선이다.
산타를 만나기 위해 visitor’s card를 발급받고 들어가서 기다렸다.
방문자 카드를 주길래 정말 이거 뭐 접견하려면 공식절차를 거쳐야하나 싶었다.
이런 생각을 잠깐이나마 했다는 건 내가 아직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는 뜻? 호호호호ㅗ호호호호호홓
가는 길은 꽤 그럴싸하게 Santa’s workshop 모양새 나게 꾸며놓았다.
음향효과로 삐그덕삐그덕 톱니바퀴 소리도 나고!
유리판대기 깔아서 빙하바닥도 만들어놓고!
20대 한국인 여성이 혼자 산타 보러 이런 유치한 통로를 지나려니
너무 웃겨서 혼자 허허허허하고 웃어버렸다.
내가 10년 전 산타클로스 믿던 시절
엄마아빠 손잡고 왔었더라면 오우우우와했을텐데.
10년만 젊었어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산타는 미국인인가? 발음이 상당히 유창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 한국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그냥 서울이라고 그랬더니, 강북 area냐 강남 area냐고 묻는다.
강남 쪽이라 그랬더니 교보 빌딩 근처냐 코엑스 근처냐고 묻는다.
산타 할아버지... 나라 관련 대사 치느라 어지간히 힘들 듯.
강북이라 그랬으면 명동이나 세종 문화 센터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중간에 사진도 한 방 찍는다.
이렇게 유치한 만남이 끝나고 방을 나오는 데 나도 모르는 새 내 손에는 20유로짜리
산타와 함께 찍은 대형 사진이 들려있었다.. 한국가면 보여줄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산타클로스는 시장자본주의자인가? 산타는 돈에 환장한 놈이 분명하다.
그의 office는 물론이고 주변은 죄다 기념품 가게에 레스토랑이다.
동심을 짓밟는 할배 같으니라고.
이 곳에서 다시 한 번 서울의 무존재감을 느끼다.
산타를 만나고 카페에서 커피에 빵 조각을 먹고
산타클로스 우체국도 구경하고 기념품도 구경해도 시간이 안 지나간다.
로바니에미 시내에는 더더욱 할 게 없고.
조금만 벗어나니 숲이 빽뺵하게 펼쳐져 있길래 숲 속 탐험에 나섰다.
눈이 많이 와 발이 푹푹 빠진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풀밭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길을 만들었다. 음하하.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니 적막한 숲 속에 나 혼자 뿐이었다.
중간에 호수와 오두막집이 나타났다면 Los Amantes del Círculo Polar의 한 장면 같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이 영화, 로바니에미와 이 근교에서 촬영했다고 들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또 방향감각 상실할까봐 잽싸게 산타마을 쪽으로 되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발자국 되돌아가면 되는 건데, 그냥 그 적막함이 무서웠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로바니에미로 되돌아 와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헬싱키 행 야간열차를 타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렇게 두 줄로 압축될 수 있는 시간이라니 참 허무하다.
기차 타기 전까지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
너무 할 일이 없는 거다!
그닥 특징 없는 시내 중심가는 10분이면 다 둘러 보고,
책도 다 읽고 내 주변에 있는 온갖 활자란 활자는 다 읽었는데도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할 수도 없고 이거 원 참.
로바니에미도 그렇고 헬싱키도 그렇고,
핀란드에 있는 내내 일본인 관광객들을 참 많이 보았다.
중국인 관광객은 인구로 따져보았을 때 전세계 어디서든 볼 확률이 높지만
핀란드에서 일본인이라...?
핀란드 철도 사이트에 일본어 페이지가 따로 있는 걸 보아하니 핀란드랑 일본이랑 좀 친한가 보다.
밍크 시체를 주렁주렁 매단 러시아 할머니들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야간열차 마침내 탑승!
진작에 침대칸으로 탈 걸 그랬다.
매표소 아저씨가 2층 침대로 예약해줘서 더 널찍하고 좋았다.
아래칸에는 탐페레로 가는 핀란드인 할머니가 탔다.
Conductor와 이야기를 하는데 탐페레 어쩌고 저쩌고하면서아저씨가 할머니 침대 옆에 알람시계 맞춰주는걸 보고
눈치로 탐페레에서 내린다는 걸 알았다.
식당칸에 가서 gin 한 잔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푹 잘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