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겹게 가게 된 뒤늦은 여름휴가였다. 원래 올해 4월 끄라비에서 나와 함께 하면서 태국의 맛 태국의 멋 태국의 에브리띵에 매료된 벗과 9월에 가기로 한 방콕 여행이었는데, 회사 출장 일정이 꼬여버리는 바람에 벗과 일정이 안 맞아 못 가게 되었다. 9월 항공권 환불 수수료 + 호텔 예약 변경 수수료를 왕창 물고 11월 말로 무작정 숙박일정을 바꿔버렸다. 어찌할지 누구랑 갈지 고민하던 중 내 눈에 들어온 우리 엄마. 바로 대한항공 가족등록을 해버리고 마일리지를 털어서 항공권 2장을 예약했다. 비수기인지 인당 4만마일 정도밖에 안하고, 유류할증료도 0원이라 세금만 10만원 정도를 물었다. 이렇게 효도관광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게 엄마와 동행하게 된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작년 이맘때 쯤 유후인 료칸으로 혼자 쉬러 가겠다고 알아보다가 내가 원하는 료칸은 1인 여행객을 받지 않거나 맘에 들지 않는 방을 준다고 엄마에게 툴툴거리다가 엄마가 같이 가줄까?라고 해서 엄마가 얻어걸렸었다(?).  

보통 휴가 예약을 해도 별로 설레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방콕이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컸다. 여행책도 사고 구글맵에 갈 곳도 신나게 찍고 태국 주재원분한테 정보도 캐묻고 내 기준 여행 사전 준비의 최대치를 선보였다. 고수 등의 향신료에 예민하고 식재료의 신선도를 귀신같이 찝어내며 적당한 간과 당도를 추구하는 미식가이자, 패키지 여행보다는 스스로 아고다와 블로그 후기를 검색하며 찾아낸 고급 리조트와 비즈니스석으로 자유여행을 즐기는 엄마를 허접하게 모셨다가는 나도 딸의 도리를 제대로 못하는 것일테니. 


아침 9시 방콕행 대한항공은...정신이 없다. 일단 단체여행객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승무원들에게 이거달라 저거달라 자리 바꿔달라 요구가 끊이지 않아 그들의 넋이 나가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부터 회사분을 만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출장이 잦은 회사다 보니 휴가 갈 때 공항버스 정류장/공항/비행기/도착지 공항에서 회사사람을 종종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바로 내 뒷자리에 낯익은 분이 앉는 것이다! 비행기 이륙전 회사동료한테 급히 연락해 혹시 누구누구님 지금 출장 중인지 알아봐달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생각한 그 분이 맞았다. 뒤늦게 제대로 인사드리고 입국수속을 받는 줄 내내 대화를 나눴다. 사실 이렇게 뵙기 전엔 잘 몰랐던 분인데 그 한 3-40분을 계기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입국장에서 유심카드를 사서 바로 갈아 끼우고 퍼블릭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 500바트 부르는거 노노 미따미따!! 외쳐서 공항세 포함 460바트 정도 나왔다. 이번 여행은 유독 길을 제대로 못찾는 일이 잦았다. 방향감각이 없는 길치처럼 길을 못 찾는게 아니라, 횡단보도/계단/에스컬레이터가 나오겠지 하고 한참 길을 가다보면 없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거나, 가게가 있는 골목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한 칸 먼저 들어간다거나. 이상했다. 심지어 첫날 처음 탄 우버 기사가 어벙한 사람으로 잘못 걸려서 빙빙 돌아간적도 있다. 방콕 길이 잘못했네 잘못했어. 


수코타이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8차선 도로 길가에 있는데도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펼쳐지는 고요함. 후기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기 좋다, 조용하다 등의 평이 있었는데 그 점에서 만점이었다. 체크인 하는 날은 한국인 직원이 있어서 더 편하게 체크인할 수 있었다. 룸컨디션은 예상 가능한 수준의 고급 시설이었고, 다만 어딘가 모르게 에어콘을 틀었는데도 꿉꿉한 냄새가 날 때가 있어서 예민한 사람은 좀 싫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을까 했는데 스파 예약 시간에 맞춰가기 애매할 것 같아서 웰컴 프룻으로 놓인 과일을 좀 먹고 엄마와 짐을 풀다가 스파로 향했다. 실롬지역에 있는 인피니티 스파에 미리 예약을 했었는데, 조금 늦을 거 같아서 전화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영어로 전화를 받는다.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온다고 들었는데, 내가 갔었을 때는 미국인 호주인 인도인 등이 있었다. 

이번 여행엔 Infinity Spa, Spa at Face를 미리 예약하고 나머지 한 곳은 호텔 근처 괜찮은 마사지샵 후기를 보고 찾아갔는데, 서비스 / 마사지사의 전문성 / 시설 면에서 인피니티스파가 월등하게 좋았다. 월등월등 인피니티스파 사랑합니다 충성충성! 심지어 올리비아라는 매니저는 한국어를 배우는 중인지 엄마와 나한테 계속 한국어로 말을 걸고 너무 귀여웠다... 귀여워............. 

나름 머리를 써서 모던한 스파와 전통가옥 스파를 동시에 경험하려고 전략적으로 두 곳을 예약했는데, 그냥 나흘 내내 여기 계속 왔어도 될 뻔 했다. 요즘 유명한 바와 스파, 오아시스 스파 등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예전에 여러번 방문했었던 아시아 허벌 어소시에이션과 비교해 보자면 거기도 좋았지만 여긴 전반적으로 더 깔끔하고 훌륭했다.  

​마사지를 마치고 나오면 주는 카모마일/페퍼민트 블렌드 차와 망고스티키라이스

​다음에 또 올게요 하투하투 


스파에 오기전에 호텔 방에서 짐풀고 뒹굴거리면서 방에 놓인 잡지랑 여행책자를 뒤적였다. 호텔을 다니면서 한 번도 그런 책들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엔 아무 생각 없이 한 권을 들춰봤다. 내가 그 책자를 기웃거린 것은 신의 한수였다. 근처 방락시장 부근에 새로 생긴 Baan Phadthai라는 식당이 2-page spread로 나와있는데, 식당 분위기가 민트민트해서 예뻤고 팟타이에만 집중한 듯한 식당 이름도 맘에 들어서 방문해보기로 했다. 

예전에 묵었던 르부아 호텔 근처를 지나니 그때 걸어갔던 길이 생각이 났다. 국수 파는 카트도 그대로인것 같고(?) 누워자는 노숙자도 그때 그 아저씨 그대로인 것 같고(?) 복권 파는 노점들도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 같고(?)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I AM MORE LOADED! YEAH! ...AND OLDER. 

방락시장 골목 안 쪽에 있는 반팟타이. (어두운 길목을 들어가자 엄마왈: 여기 맞나?) 엄마가 가방을 약간 움켜쥐었음을 난 느낄 수 있었다. ㅋㅋㅋ하지만 이날 따라 평일 늦은 저녁이라 사람이 없는 것 같았고 평소에는 사람들도 많이 다니고 식당에도 손님이 많지 않을까 싶다.   


식당은 꽤나 한산했고, 빈티지한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태국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색깔을 자유롭게 쓸까? 구글맵 아래 있는 친절한 한국분의 리뷰에 따르면 식당 매니저가 약간 부담스럽게 메뉴를 권하고 음식이 어떤지 물어본다는데 우리에겐 전혀 그러지 않았다. ​쏨땀 + 팟타이 꿍 + 팟타이 푸를 시키고, 엄마에겐 그 유명한 땡모반을 드셔보라고 권했다.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데 한 모금 마셔보더니 어머어머! 맛있다!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그렇게 뿌듯한 순간이 따로 없었다. 엄마에게. 엄마에게...인정을..받다니............엄마에게 인정받은 땡모반집..아니 팟타이집이었다. 

이 날 식당 식기나 테이블의 청결도를 보며 엄마가 이 정도면 허름한거 아니야? 라고 해서 잠시 그 다음날 갈 세상세상 허름한 맛집을 데려가야 하나 고민에 빠졌더랬다. 


​볶지 않은 공심채도 나름 먹을만했다. 그릇 크기 대비 팟타이가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적당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길거리 팟타이도 충분히 맛있지만, 깔끔한 분위기에서 적당한 양의 오리지널 팟타이를 먹고 싶다면 반팟타이...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인피니티 스파를 이용하거나 르부아 호텔/그 인근에 묵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 가보는 거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난 일단 엄마가 여기 쏨땀과 땡모반에 만족한 것만으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호텔 방에 비치된 여행책자를 뒤져볼 생각을 한 내 무의식아 잘했어...참 잘했어. 

​이런 실링팬 돌아가는 빈티지한 무드 좋다. 


안가면 아쉬운 아시아티크도 들렀다. 결국 여기서 절대 안 사고 짜뚜짝 가서 살 거면서 괜히 가본다. 우리 가족은 기념품 쇼핑은 거의 하지도 않는데 일단 구경삼아? 배 타면서 바람 쐬며 야경구경하려고 잠시 들렀다. 허벌볼+루파스틱만 사고 금방 나왔다. 


여기서 우버 기사를 불러서 숙소로 돌아가는데, 대환장쇼였다. 일단 우버 내비게이션이 잘못되었는지 수코타이를 찍으면 수코타이 옆 골목으로 안내를 해서 한참을 뒷골목을 빙빙 돌았고, 잘못 도착한 장소에서 우버기사가 다시 구글맵을 찍고 가는데 호텔 반대편으로 가길래 아니라고 세워서 알아봤더니 구글맵에 수코타이를 검색하면 나오는 다른 호스텔! 호텔도 아니고 호스텔!!로 향하고 있었다. 세상 어벙꺼벙한 우버 기사였다. 

그렇게 뱅뱅 5분 더 돈 건 어떻게 할 거냐 했더니 80바트만 받겠다고 하더니 그 다음날 온 영수증엔 원래 요금 그대로 100바트가 넘게 청구되어 있었다. 내가 내리자마자 점수를 3점 줘서 복수심에 그런건지 의사소통이 안된건진 모르겠지만 한 10초 정도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봤자 천원? 천오백원 차이라 shrug off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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