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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새벽에 한 다섯 번은 깬 것 같다.

벌떡 깨서 시계 보면 12시 반. 3. 3시 20. 4. 5시 45

 




시간 맞춰 일어나 터미널로 향하는 데 밤 사이 폭설이 내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걷는데, 보통 때였음 유치하게 이리저리 밟고 뛰어다녔을 테지만

짐꾸러미 들고 옷은 다섯 겹 껴입어 뒤뚱뒤뚱 힘겹게 걷고 있자니 그닥 신나지 않았다.

 

어둡고 텅 빈 새벽녘 탈린 거리를 걷는데

동유럽 남자 두 명이 나보고 헬싱키행 페리 타는 터미널이 어디냐고 묻는다.

 


순간 경계했다.

길에는 아무도 없고!!

나는 얼마 전에 본 영화 Taken이 생각났을 뿐이고!!

우리 아빠는 전직 CIA 요원이 아니라서 납치되면 난 그냥 뿅하고 사라질테고!


하지만 이 애들은 그냥 길치였다

나도 터미널로 간다니까 나를 쭐래쭐래 따라오더니

어느 순간 뒤를 봤더니 다른 길로 갔는지 사라졌다. 

 

이번에는 배 내부 구경하기 귀찮아서 짐도 안 맡기고

카페테리아에서 이것저것 아침거리를 사서 에스토니아 돈을 처리하고

그냥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다.

J D Salinger Franny and Zooey를 읽는데,

Franny 파트는 재밌게 읽었으나 Zooey 파트로 가면서 

무식한 나로서는 도대체 이 책이 뭘 말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종교적인 책인 줄 나는 몰랐네 정말 몰랐네                                        


 

바다를 가르면서 일출을 볼 수 있겠지 싶었으나

나는 잊고 있었다. 내가 북유럽에 있다는 사실을........

구름이 모두 걷히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어두컴컴한 밤바다가 약간 푸르딩딩한 하늘로 바뀌는 광경만 볼 수 있었다.  

 



헬싱키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유진이가 있는 Jyväskylä로 향하기 전 여행책자에 나와 있는

일본 식료품 가게를 찾아가 컵라면을 사기로 했다.

이걸 사서 로바니에미에 들고 가서 호텔에 포트를 달라고 부탁해서

컵라면을 끓여 먹음으로써 식비를 조금이나마 아끼겠다는 똘똘한 아이디어!



가는 길에 발견한 동상. 
왼쪽의 저것은 인간인가 고릴라인가?  

눈에 파묻혀서 알 수가 없다.
누가 알아내면 저한테 좀 알려주세요.

그러나 애써 찾아간 일본 식료품 가게는 경제가 침체되어서인지 (내 추측일 뿐)
문이 닫혀있고
문에는 핀란드어로 샬라샬라 써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지.

나름 똑똑한 계획 수포로 돌아가다.

 


그 가게 찾는다고 돌아다니다가 배만 더 고파져서
역으로 돌아가 샌드위치에 커피 사 먹었다.

 


이위베스퀼레로 출발!

가는 길에 침엽수림과 눈에 덮여 호수인지 알 턱이 없지만 얼음낚시 중인 사람들로 보아 호수임이 분명한

풍경을 지나치면서 내가 정말 핀란드에 와 있다는 걸 느꼈다. Hyvä!!

 


이위베스퀼레 역에 도착하니 유진이가 친히 마중 나와있었다.

유진이가 자기 살쪘다고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오히려 맑은 핀란드 공기 마셔서 그런지 예뻐졌다. 짜식. ㅋㅋㅋㅋㅋㅋㅋ 




유진이가 동네 구경 도서관 구경도 시켜줬다.


버디 시절 계속 들어보았던 이위베스퀼레에 내가 오게 될 줄이야!

참 나. 2005년 가을 라우리랑 마띠가 왔을 때
도대체 쟤네 대학이름 발음은 들어도 들어도 따라하기 어렵다며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 오니 헬싱키에 비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신호도 없고 자전거 도로도 없고 아무렇게나 눈밭에서 타는 게 더 편해 보였다.


약 세네 시간 유진이와 동네 구경하고 시간 때우고,

어느새 헤어져야 할 시간!

작별 인사하는데 괜히 찡했다. 유진아 한국에서 보아 <3



 



탐페레에서 한 시간을 보낸 뒤 로바니에미 행 야간열차로 갈아탔다.

탐페레도 구경하면 좋았겠지만 짐을 낑낑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닐 여력이 없었다.

탐페레: 이름이 너무 예쁘다.

핀란드 사람들은 땀페레-에 가깝게 발음하고 살짝 끝을 내리는데,

그 억양이 이유 없이 너무 맘에 든다.


 

로바니에미 행 야간열차는 악몽 그 자체였다.

! ! ! !!!!!!!!!!!!!!!!!!

여기서 얻은 교훈: 쓸데없는 데 돈 아끼지 말자.

야간열차 예약할 때 돈 아낀답시고 침대칸 대신 그냥 좌석으로 예약했었다.

처음 탔을 때는 다 괜찮았다.

뒤로 눕힐 수 있는 좌석이고, 의자도 널찍하고, 사람들도 별로 없고.

양치질도 하고 신발도 벗고 파카를 이불 삼아 덮고 눈을 꼭 감고 잘 준비를 했다.


...
나는 야간열차면 좌석 칸도 불을 꺼줄 줄 알았다.

이게 웬걸.

대낮처럼 형광등을 쨍하게 켜놓은 채로 기차는 내내 그렇게 달렸다.

철도가 고르지 못한 건지 기차가 낡아서 그런 건지 차체가 심하게 덜컹거린다.

중간 역에서 몇 명이 타더니 맥주를 마시면서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어떤 인간이 심하게 코를 골기 시작한다.

이렇게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를 뚫고 칸 전체에 울려 퍼지는

코고는 소리는 내 23년 인생 살면서 처음이다. 코골이 수술 강력추천.

밝고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 웬만해서 머리 눕힐 곳만 있으면 잘 자는데 이건 아니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금 생각해도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사방으로 하이킥을 날리고 싶은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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